전국여행 * 문화탐방/강원도

남이장군 묘

자즐보 2019. 9. 27. 22:14



남이장군 묘(南怡將軍 墓)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남이섬길 1 소재


남이장군(1441년/세종23~1468년/예종 1)은

충북 음성 출생으로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 본관은 의령이다. 

17세(1458년)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25세에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1468년(예종 1)

11월 2일 겨우 28세의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1818년(순조 18)에 관직이 복귀되었으며, 충무(忠武) 시호를 받았다.






남이장군 북정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바위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頭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아로 태어나 이십대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일러 나를 대장부라 할 것인가


 1468년 9월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등이

남이장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해 28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남이의 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자광은 남이의 북정가 귀절 중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得國"으로 변조해

나라를 얻으려 하고 있다고 예종에게 밀고했던 것. 예종은 수차례 현지에 사신을 파견해

사실여부를 조사했으나 사신조차도 음모에 가담된 관계로 未平國이아닌 未得國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平을 得으로 고친 꾀가 가히 권모술수의 천재라 할 유자광은

그 후에도 자신의 출세와 부귀를 위해 계속 남을 모함하다 결국은 귀양가서

소경이 됐으며 궁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남이장군은 400여 년이 지난 후인 1818(순조 18)년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작(官爵)이 복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후에 창녕의 구봉서원 (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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