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자즐보 2016. 12. 13. 19:09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여덟 폭의 병풍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정조대왕이 수원에 행차할 때 있었던

여러 행사 장면을 그린 것이다. (1795년, 비단에 채색, 각 147 x 62.3cm)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서장대야조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득중정어사도                환어행렬도                   한강주교환어도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은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몹시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행궁을 지었다. 행궁이란 임금이 외부에 머물 때 사용하는 궁이다.

행궁을 짓는 사업은 3년 가까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탄신 60주년을 맞았다.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동갑이었으므로 두 분이 모두 이 해에

환갑을 맞게 되었다. 1795년의 일이었다.

 

정조대왕은 그해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소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했다.

부모님의 환갑을 축하하고자 한 일이었다. 수원에 가서는 그 주변에 사는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여러 문인과 무인들을 모아 과거 시험을 치르고, 활쏘기 시합을 벌이는 등 갖가지 행사를 벌였다.

행사가 계속 되는 동안 벌어진 일들과 정조대왕의 무리가 오가는 모습을 병풍에 담은 그림이 바로

〈화성능행도〉이다. 이 병풍에 그려진 그림도 부분적으로는 직선을 많이 써서 딱딱한 느낌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밤에 군사를 조련하는 장면이나 대왕의 행렬이 지나가는 장면은 마치 새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무척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그려졌다.

 

특히 수원에서 시흥으로 되돌아 오는 행렬 모습을 그린 〈환어행렬도〉는 압권이라고 할 만하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말을 탄 무사, 창과 칼을 든 병정의 호위 아래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가마 행렬이 지나가는 데 길가에는 앉은 사람, 서 있는 사람, 남자, 여자, 아이, 노인 등 수많은 구경꾼이

나와서 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그렸다. 진짜 행렬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처럼 생동감 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면 행렬은 그림 왼쪽 아래에 그려진 시흥에 임시로 마련된 행궁을 향해 가는

모습이다. 칼과 화살을 찬 말 탄 무사들이 왕의 가마인 어가 앞을 지키며 가고 있고,

그 뒤로는 왕의 행차를 상징하는 햇볕을 가리는 커다란 양산인 일산과 용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따라오는

중이다. 그리고 행사에 동원된 부대를 나타내는 깃발들이 뒤따르고 있다. 깃발 부대에 이어서는 말을 끌고

오는 행렬이 있다.

이어서 붉은 전복을 입은 무사들이 겹겹이 삼엄한 호위를 펴는 가운데 장막 쳐진 가마 행렬이 계속된다.

장막으로 가리고 가마를 메고 가는 이유는 왕가의 여인은 함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이 장막을 친 가마 옆 길가에는 작은 천막과 붉은 수레, 말 등이 머물러 있는데, 이들은 행차

도중에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을 올리기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준비한 일행을 그린 것이다.

 

수백 명에 이르는 행렬에 나오는 무관들과 궁녀들은 제각기 계급이나 역할에 따라 복장이나 무기뿐 아니라 모자에 꽂은 꽃도 갖가지다.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와 언덕에는 이런 거창한 행차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선비, 평민, 아낙네, 아이들을 모두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렸다.

그중에는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아는 사람끼리 둘러 앉아 행차를 구경하는 모습도 있다.

남자들 옆에 앉아 있는 여인네들은 봄볕이 따가운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다. 또 숨은 그림 찾기처럼

개울 저편에는 뒤늦게 행렬을 구경하러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6,000명의 인원과 1,400마리의 말이 동원됐다고 한다.

이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은 족히 돼 보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리면서

모두를 꼼꼼하게 묘사하는 일은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병풍은 당시 궁중에서 실력이 쟁쟁한 화가 7명에게 그리게 했다고 한다.

실제 그림을 그리는 기간도 상당히 길어서 행사가 끝난 다음 해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다 그려진 그림을 본 정조대왕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화가 중에서 특별히 두 명을 뽑아

큰 상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화성능행도〉 병풍은 당시에도 인기가 무척 많았다.

원본을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병풍이 오늘날에도 여러 벌 전해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인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다음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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