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3일
남한산성(南漢山城)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축성된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서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남한산성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동문 앞, 남한산성 표지석
남한산성 동문 (좌익문 左翼門)
동문은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있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쪽에는 가로 31센티미터, 세로 16센티미터의 철린으로 보강했다.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에서 도로를 건너 남문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남문(지화문 至和門)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으로 정조 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남문 밖에는 성남시에서 보호수로 지정 한 약 35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한산성 성곽 준공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 및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한산성 본성 안내도
수어장대와 청량당 안내도
청량당(淸凉堂)
청량당(淸凉堂)은 수어장대 담 밖 서쪽에 있는 당집이다.
이 집에는 남한산성의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였던 이회와 그 부인,
그리고 서북성을 쌓은 벽암스님 김각성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성곽 축성인의 모함으로 참수를 당했으나 후에 모함임이 밝혀져
그의 혼령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청량당은 화방벽을 눈높이 만큼 올린
3칸 문간채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청량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다.
청량당을 지켜온 향나무
청량당에서 수어장대로 오르는 계단
아름드리 소나무
수어장대(守禦將臺)
본래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다.
현대와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장대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보통 한국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1751년에 이기진이 영조의 명을 받아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다.
"수어장대"란 이름은 이 서장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장대의 편액을 수어장대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수어장대 건물은 1896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한 것이다.
수어장대는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무망루(無忘樓)
무망루 옆, 이승만 전대통령 기념식수비
수어장대 동편 모서리에 자연석 바위, 守禦將臺라고 음각되어 있다.
탁지부측량소 삼각점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연결된 성곽
서문(우익문右翼門 )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우익문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6개의 홍예석을 올려 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이용하였다.
서문에서 북문쪽으로 연결된 성곽
북문(전승문 戰勝門)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추정한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5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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