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고령군

개실마을 점필재종택(佔畢齋 宗宅)

자즐보 2014. 8. 18. 23:08

 

 

 

점필재종택(佔畢齋 宗宅)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에 소재

 

점필재 종택은 조선 후기 영남 사림파의 종조인 김종직(金宗直,1431~1492) 가문의 종가이다.

김종직길재(吉再)의 학풍을 계승한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세조 8)에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김종직은 성리학 보급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훈구파와 대응하여

영남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김종직의 학통은 후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으로 이어졌다.

 

아버지인 김숙자 이후로 계속 밀양에서 거주하고 있던 김종직 가문은

17세기 중반 5세손인 김수휘(金受徽) 대에 와서 고령에 정착하였다.

당시 고령에 세거하고 있던 처부 최필손과 박언임의 전민(田民)을

각기 분급 받음으로써 재지적 기반을 마련하여 고령현 서면 하동방

하가야리로 오게 되었고, 안채는 1800년경 사랑채는 1812년경에 지어졌다.

 

 

개실마을 앞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 종택 입구" 비석

 

 

 

점필재종택 전경

 

 

 

 

솟을대문채

 

 

 

 

 

정면 5칸의 사랑채

 

 

 

사랑채 처마밑에 걸려있는 "문충세가(文忠世家)" 편액

 

 

 

 

사랑채 왼측으로 안채로 출입하는 통로

 

 

 

안채와 중사랑채

 

 

 

안채의 오른쪽 고방채

 

 

 

중사랑채에서 뒤편 사당으로 연결된 통로

 

 

 

동편 뒤쪽의 사당

 

 

 

 

동편의 협문

 

 

 

서림각(棲林閣)

점필재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는 건물로 실제 유물은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곳에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점필재 김종직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 또는 효관,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이다.

1431년(세종 13년)에 아버지 숙자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상 영봉리 사람으로, 동향인 길재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아들 종직에게 전수하여

뒤에 영남학파의 종주로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숙자는 밀양의 박홍신의 무남독녀에게

장가 들었다가 장인 박홍신이 대마도에 나아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자

밀양 처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종직을 낳았다.

 

종직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총명하여 날마다 수 천자씩을

기억해 갔다고 한다.아버지의 교육은 길재의 교육방법을 따라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곡편을 거쳐 소학, 효경, 대학 및 논맹 순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철저히 밟고 사서, 오경을 차례로 배웠지만 특히 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고

어릴 때부터 시를 잘하여 이름이 크게 떨쳤다.

 

16세 때 경사에서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발하여

23세 겨울에 금산 봉계의 현감 조계문의 딸을 맞아 결혼함으로써 김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김맹성과 황옥산 능여사에서 공부하고, 23세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주역 등 경전을 탐독하였다.

 

25세에는 세조 즉위를 축하하는 동당시에 종형 종석과 함께 응시하여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이듬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밀양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복상여묘 하였다.

29세에 형 종석과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벼슬길이 열려 곧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는데 그 문명이 조정에 널리 알려져 형과 함께 한직을 주어 금산 출신의 허종,

이숙감을 비롯하여 어세공, 이극균, 어세겸, 민수, 정효상, 이영근 등을 선발하여 사가독서케 하였다.

이때부터 문명으로 유명하여 각종 책문을 임금께 올릴 정도였다. 세조는 학문을 권장하는

방책으로 대표적인 연소한 문신을 뽑아 한직에 제수시키고 예문관의 직까지 겸하게 하여

매일 번갈아 토론 강습토록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종직은 이파, 정간종, 이명현, 김종연,

여세공, 류문통, 정영통, 송춘림, 김순명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40세에는 성종이 즉위하여 경연을 열고 재행이 겸비한 학자를 선발하여 예문관을 겸직케 하였는데

응선한 19명 중 선생이 첫 번째 선발되어 예문관수찬, 지재교, 경연검투관/기사관을 겸하였다.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청하여 고향에서 가까운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함양에서는 나라에 진상하는 차(茶)종을 심었다는 기록을 보고 수소문 끝에 지리산 엄천사 죽림에서

두어포기의 차종을 발견하여 관전에 심어 재배하니 2년후에는 상납할 물량이 넉넉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어 군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춘추로 향음주례와 양로례를 행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김숙자의 교육방법대로

소학을 기본으로 하여 총명한 관동을 뽑아 일과를 정하여 교회하였다.

이 무렵 유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의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내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후일의 ‘무오사화’ 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문인이 운집하였다.

수제자 김굉필, 정여창이 이때에 점필재문하에 와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경기, 강원, 전라도 3도의 관찰사, 한성좌윤, 형조판서, 지경연, 홍문과제학 성균관시를 거쳐

1489년(성종20년) 59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병으로 사퇴하니, 성종은 지중추 부사로 이배하고

특명으로 전직을 바꾸지 말라하고 사관을 보내어 돈유하고 녹봉을 받으라 하였다.

점필재는 세차례나 상소로 사퇴했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고, ‘점필재는 단직하고 성긴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이 넓고 깊다’ 라는 내용의 친재비답을 두차례나 보내어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의 저서로는 유두유록, 청구풍아, 오경석의, 당후일기, 동문수, 여지승람, 1,200여편의 시(時)등이

전해오고 있다. 선생을 보양하는 서원은 밀양 예림서원,선산에 금오서원등 8곳에서 재향하고 있다.

무오사화로 몰락한 김종직 가문(善山金氏)은 경남 밀양, 합천 야로를 번갈아 전소면서 고령용담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임진왜란을 당하고 1651년(효종2년) 점필재 김종직의 5대손 남계공 김수휘가

이곳 ‘가곡’ 에 택리 정착하여 지형을 살피니 앞산을 접무봉, 뒷산은 화개산이라 꽃피고 나비 춤추는

형국이라 하고 동명을 개화실로 명명하고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가곡(佳谷)으로 불리우다가

350여 년을 한가문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오면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개애실로 통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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