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도시 순흥
도시 전체가 두 번이나 완전히 불에 타버린 비운의 도시 순흥.
순흥은 고구려 때 급벌산군이었고 신라때에는 급산군이었다.
고려때 흥주도호부로 커졌으며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胎)를 잇따라 묻으며
순흥부로 승격됐다. 이때 태장(胎藏, 후에 일제에 의해 胎庄)이란 마을이름도 생겼다.
1413년에는 지방읍으로서는 격이 아주 높은 순흥도호부가 됐다.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 할 만큼 번창했던 순흥은 조선시대 99칸 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이를 두고 고래등 같다고 했다.
순흥도호부의 대참화
1457년 가을, 영남의 큰 도시 하나가 피비린내 속 하룻밤에 증발했다.
관군의 눈에 띈 사람은 양반이든 노비든 닥치는 대로 살육되고 온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죽은 사람의 수가 얼마인지 셀 수 조차 없었다. 그 시신을 갖다버린 죽계천(竹溪川)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해 무려 7km 하류 마을에 가서야 멎었다.
그 마을은 그때부터 ‘피끝마을’로 불렸고, 현재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이다.
‘남순북송(南順北宋)’…‘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이북은 송도’라며
영화를 누리던 소백산 남쪽 기슭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의 증발사다.
하루새 ‘역모의 도시’로 낙인 찍혀버린 순흥에선 무슨 일이 있었기에...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세조)에 오르자
1457년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에서 이보흠 순흥부사와 극비리에
조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한다. 영남의 수많은 인사들이 가세했다.
이 때 한 노비가 이보흠의 집에 숨어들어 이 비밀문서를 훔쳐 달아났고
결국 ‘거사’는 꿈도 펴보지 못한 채 발각돼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죽음을 맞았고
영월에 유배간 단종도 곧바로 사사된다.
이 ‘역모의 싹’이 튼 순흥은 졸지에 풍비박산이 났다.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집은 있는 대로 불태웠으며 도호부의 땅은 쪼개고 쪼개 영천(영주)과 풍기, 봉화,
단양, 영월, 태백 등으로 편입시켜 ‘싹’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순흥은 남은 땅에서
순흥현으로 강등됐다. 역사에서 말하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 때 거사의 본거지였던 큰 사찰 숙수사(宿水寺)도 당간지주만 남기고
모조리 불 타 버렸다. 부석사와 함께 이 일대에 ‘불국토’를 형성했던 사찰이었다.
폐허의 도시, 순흥은 암흑기를 거쳐 86년이 지나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543년 이 불국토의 땅에 이번엔 유교의 요람이 등장한다.
풍기 군수로 온 신재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이 지역 출신 고려말 유학자
안향(安珦) 선생이 공부했던 숙수사 터에 그의 뜻을 기려 1543년(중종 38년)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학문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분이다.
주세붕이 이곳에 왔을 때 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이 죽계천에 밤마다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피의 도륙’이 있고나서 1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하루 아침의 날벼락에 원혼들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주세붕은 내천에 있는 큰 바위에 붉은글씨로 ‘敬(경)’이라 새기고
제를 올리니 원혼들이 고이 잠들었다. ‘敬(경)’은 ‘공경’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듯 하나씩 수습되자 각지에서 유생들이 몰려왔다. 서원도 활기를 찾았다.
주세붕 군수는 조선의 근본사상이 되는 유학(儒學)을 가르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또한 풍기 주민들에게 산삼을 가삼(家蔘)으로
재배하는 기술을 보급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백운동서원에 대해
조정에 사액을 건의하자 1550년 16살의 명종(明宗)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을 써서 사액하고 사서오경 등 책과 토지, 노비를 파격적으로 지원하여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사학으로 우뚝 서게된다. 백운동서원은
이때부터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 정신문화의 메카로 우뚝 서서
4천여 명의 인재를 길러냈고, 퇴계 선생은 성리학을 집대성, ‘동방의 주자’로 불렸다.
이후 의병활동으로 순흥은 또 다시 참화를 격는다.
의병들의 대부분은 학문을 숭상하고 충과 효를 다했던 선비들로서,
동방성리학의 진원지 순흥은 수많은 유생과 의병들에게도 성지(聖地)이자
본향(本鄕)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순흥은 이들 의병들의 뛰어난 활동으로 인해
일제에겐 눈엣가시 같은 고을이었고 결국 의병 소탕을 핑계로 순흥을 폐고을 시키려는
일제의 간악함에 또 한 번의 대 참화를 겪는다.
일제는 애국애민하는 선비의 기개가 살아 있는 순흥 땅을 그냥 두어서는
두고두고 후환이 두려울 수 있으니 싹을 없애야 한다며 1907년 11월
본국 병사 1천700여 명을 불러들여 순흥을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시 일제는 소백산을 근거지로 활약했던 신돌석과 이강년 휘하 500여 명의
의병을 소탕한다는 미명아래 순흥도호부 관아와 소재지 민가 180여 호를 불태웠다
(대한매일신보 융희원년 11월15일 기사 참고). 이때 불에 타버린 민가는
아흔아홉 칸 대저택만을 계수했다고 하니 그 당시 참화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 피끝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