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와룡면

역동 우탁 재사 및 유허비

자즐보 2013. 5. 2. 16:37

 

 

역동 우탁 재사(易東 禹倬 齋舍)

 

 

 

역동우선생 시조비

 

 

 

 

 

삼의문(三宜門)

삼의(三宜)란 도학(道學), 충의(忠義), 절조(節操)를 뜻한다. 

 

 

정정재(鼎井齋)

 

 

영모실(永慕室)  

 

 

강의당(講誼堂)

 

 

 

역동우선생 묘소

 

 

 

역동 우탁(禹倬, 1262~1342)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 호를 단암(丹巖)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라 한다.

고려 1262년(원종 3)에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우천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향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17세에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충렬왕 4년 29세의 나이로

지공거(知貢擧)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가 과거급제 후 처음으로 얻은 직책은 영해(寧海) 땅의 사록(司錄)이었다.

이 때 영해군에는 팔령(八靈)이라는 귀신을 숭배하는 미신이 있어서, 군민들은 신사를 짓고

그 귀신을 아주 성대하게 제사지내곤 하였다. 우탁은 이 영해군의 사록으로 부임하자마자

이 팔령이라는 귀신을 제사지내는 신사를 부수어 바다 속에 쓸어 넣어 버렸다.

그리하여 미신적인 숭배 의식을 근절시켰다는 것이다.

우탁은 이 밖에도 아홉 고을에 걸쳐 요망한 귀신들을 숭배하는 사당과 허가받지 않고 세운

절들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건립한 절만을 제외하고 그의 손이 미칠 수 있는 땅의

모든 종교적 건축물들을 제거하여 버린 것이라고 하겠다. 지방관의 직책을 거쳐 중앙으로 진출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역임하였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우탁은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예안현 서남쪽  5리쯤 되는 곳에

은거(현, 안동시 와룡면)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후에 사람들은 우탁이 은거했던 마을을 지삼의(知三宜), 또는 지삼리(知三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학(道學)과 충의(忠義)와 절조(節操)의 세 가지 덕을 갖춘 우탁이 만년을 보낸 땅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호칭이라 한다. 우탁은 충혜왕(忠惠王) 3년, 1342년 2월 7일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주변 기록들에 의하면 우탁은 성리학 도입기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역(易)』에 대한 식견은 당대 최고의 것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우탁의 저작으로는 『초학계몽편(初學啓蒙篇)』과 『가례요정편(家禮要精篇)』,

『도주편(徒酒篇)』 등이 있었고, 『역논(易論)』과 『역설(易說)』이 있다.


 

역동 유허비

원래 안동군 예안면 선양동 역동 선생의 옛 집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고려좨주역동우탁선생유허

高麗祭酒易東禹倬先生遺墟

 

 

 

※ 역동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역동서원이

안동대학교 내에 있고, 역동서원은 안동시편에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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