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서후면

안동김씨 태장재사

자즐보 2013. 4. 23. 15:16

 

 

 

안동김씨 태장재사(台庄齋舍)

 

 

안동 김씨 시조 태사 김선평 공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집으로

조선 영조 26년(1750)에 후손들이 지었으나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원래 있던

승려집을 철거하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었다. 1913년에 10칸을 다시 짓고

1960년에 수리하였다. 태장재사라 하는 것은 재사 전체를 일컫는 말이며 ㅁ자형의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는 내정보다 한단 높게

구성되어 있는 건물이다. 처마 끝에는 빛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차양이 있으며,

간결하고 검소한 집이다. 재사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이 있다.

 

 이 지역 재사 건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비교적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로 해마다 10월 10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상루(履霜樓)

이상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큰 규모의 2층 누각이다.

중앙의 처마 밑에는 ‘이상루(履霜樓)’ 현판이 있다.

서리를 밟으며 새벽 일찍 조상을 섬긴다는 의미이다.

 

이상루는 집의 전면에 있는 건물로 제사를 지낸 후

음식을 먹거나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상루 1층 7칸 중 가운데에는 출입을 할 수있게 두 쪽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

1층의 기둥은 8각으로 모가 나게 깎은 것이고, 주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원구의 형상으로 잘 깎아 놓았다.

 

 

 

2층 누마루에는 밖으로 쪽마루를 돌리고 난간을 달았다.

난간은 계단이 놓여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사방으로 돌아간다.

 

 

 

 

정면7칸 측면 2칸의 넓은 누마루

 

 

 

 

안마당의 정면 뒤쪽으로는 9칸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당에서는 5단 계단을 통해 건물의 마루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태장재사에는 각 방마다 누가 쓰는 방인지가 표시된

나무쪽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관리사로부터 6칸은 참제원실(參祭員室), 그 옆으로 장노실,

유사실, 전사청이 나란히 1 칸씩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의 가운데 부분 처마 밑으로는 ‘태장재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상루 마루 위에 서서 안마당을 향하면 왼쪽은 관리사 영역이다.

관리사 옆에 측문이 있고, 그곳을 통해 재사로 들어올 수 있다.

 

 

측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쪽마루와 난간을 두른

두 개의 방이 있는데  ‘전임실’이라는 나무쪽이 붙어 있다.

  

 

 

 

 이상루 앞 연못

 

 

 

김태사 묘단으로 가는 길 

 

 

 

 

김태사 묘단 

 

 

 

 

 

동편 문인석

 

 

동편 무인석 

 

 

서편 문인석 

 

 

서편 무인석

 

 

산신제단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의 묘단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1750년(영조 26)에 건립되었다. 1653년(효종 4)에 처음 지어진 안동권씨 능동재사에 비해

1세기 정도 늦은 셈이다. 이 100년의 시차는 조선왕조의 가문 의식이 틀을 잡아가던

시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다른 경우보다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가문의 재사 사이에 나타나는 시차는 두 가지 요인이 뒤섞여 작용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안동권씨의 시조 묘는 실전되기는 하였지만 찾을 수 있었던 탓에 시조 묘를 수호하고

묘제를 주관하는 건물이 일찍 건립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안동김씨 시조 묘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1624년(인조 4) 결국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부의 서쪽, 천등산 좌측 줄기에

봉우리가 하나 있으니 태장이라고 한다”는 기록에 의거해서 여기 설단을 하고 그 아래

재사가 들어서게 된 것이지만, 이러한 차이가 아무래도 두 가문의 재사 건설 시간표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다른 하나는 안동권씨는 고려 때부터 크고 작은 벼슬아치를 계속 배출하며 가문의 성가를

높이 쌓아 나가고 일문의 구성원 숫자를 확장하여 나갔다. 그런 점에서 안동김씨

안동권씨 만큼 초기의 성장이 비약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안동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가문의 위세가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가문의 성장 과정 속에서 보이는

이런 차이가 가문의 구심점인 시조 묘단 건립과 시조 묘를 수호하는 재사 건설의 시간 차로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태사신도비각

 

 

 

가을속 태장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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