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영양군

영양의 석탑과 삼구정,오극성고택

자즐보 2012. 4. 15. 19:00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현일동 삼층석탑 

 

 

 

 

 

 

 

 

 

 

 

현동 당간지주

 

 

 

 

 

 

 

화천동 삼층석탑

 

 

 

 

 

 

 

 

 

 

 

영양 삼구정(경북문화재 자료 제232호)

황간현감을 지낸 문월당 오극성의

장남 용계 오흡(1576~16411)이 건축한 건물이다.

 

 

 

 

 

 

 

 

오극성 고택(경북문화재 자료 제498호)

오극성 고택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책록된 문월당 오극성이 낙향하여 건립한 가옥이다.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1760년경에 개수한 이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오극성의 자는 성보, 호는 문월당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았다.

 

1594년(선조27)에 병과에 급제한 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00년(선조33)에 옥선대 아래로 낙향하여 문월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오극성 고택은 정침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진

사랑공간이 있고, 우측에는 온돌방 1칸과 부엌, 고방을 두었는데,

좌측의 사랑마루와 우측의 고방은 좌,우로 1칸씩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으로는

각각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 함양오씨 문중이야기

    함양 오씨의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를 지냈고, 명종 조에 명주에 출몰한 외적을 격퇴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에서 본적을 나누어 본관을 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 오극성(吳克成, 1559~1617)

오극성은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아버지는 오민수(吳敏壽)이고, 어머니는 무안박씨 참봉 박붕(朴鵬)의 딸이다. 1559년(명종14) 정월 아무날에 영산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을 지녀서 어버이를 모시기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남다른 기질을 가져서 남들과 함께 숙이거나 우러르지 않았다. 글을 읽는 여가에 활쏘기를 함께 익혔으니 그 뜻은 장차 아울러 쓰려는 것이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여러 군이 함락되니 걱정하고 분하여 시를 지었다.

“나라의 일을 어찌 말하랴. 외로운 성에는 이미 도움이 끊어졌네. 남쪽 고을에는 의로운 선비가 없구나. 누구와 더불어 충성스러운 귀신이 될까.(國事那堪言 孤城已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 마침내 여러 관료들에게 글을 올려 지키고 막을 방책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뒤에 호남의 장사들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는 것을 듣고 반드시 복수하려고 눈물 흘린 감개가 여러 번 시에 나타났다.
갑오년(1594년)에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아우 오윤성과 함께 권무과에 오르니 주상께서 비로소 그 모습을 알고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1595년(선조28)에 도총부 도사 겸 비변랑에 옮겼다. 공은 글을 짓는 데에 능했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 어려운 글들은 공이

지은 글에서 많이 나왔다. 또 명령을 받들어 남으로 내려가서 상소를 올려 아뢰니 임금께서 가납하였다.
1598년(선조31)에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이때 관찰사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명나라 장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데 공이 가서 종군했다. 겨울에 아우와 함께 이통제사의 막하에 나아가 수군을 단속하여 거느리고 도적을 추격하여 남해 바다에 이르러 크게 깨뜨리고 삼등공신에 기록되었다.

1600년(선조33)에 훈련판관에 제수되고, 1601년(선조34)에 봉상시정에 제수되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한 낭관이 있었는데

오극성이 타는 말을 좋아하여 저자에서 흥정하는 것처럼 사고자 하였다. 오극성은 마침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옥선대(玉仙臺) 아래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 문월당이라는 편액을 달고, 옛 사람을 마음에 품고 날마다 시골의 늙은이와 들판의 벗들과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1617년(광해군9) 11월에 돌아가시니 수가 59세였다. 이듬해 3월에 청기 관령 부감원에 장사하였다.

부인인 숙인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교위 황승백(黃勝白)의 딸로, 맑고 현철하여 부인의 행덕이 있었다.

오극성보다 12년 뒤에 돌아가시어 오극성 묘 왼쪽에 붙여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