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경당 장흥효(1564~1633)

자즐보 2011. 12. 14. 18:31

 

 

경당(敬堂) 장흥효(1564~1633)

 

군자의 학문 외길 걸은 ‘선비의 정석’

김성일·류성룡 밑에서 학문 연마

자신의 언행을 늘 글로 남겨 점검

가난한 친척엔 열성 다해 도와줘


군자의 학문이란 오직 참으로 알고 그것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요체다.  

아는 것이 참되면 다른 쪽으로 유혹될 것이 없으니 반드시 행하는데 힘쓰게 된다.

행하는 것이 성실하면 스스로 속일 폐단이 없으니 알기를 더욱 분명히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덕을 닦고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다.

경당 장흥효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이런 군자의 학문을 하는데 전념한 인물이다.

이런 경당에 대해 후학들은 경당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학자들도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해, 위로는 세상에 경륜을 펼 수 없었고 아래로는 후대에 학문을

전할 수도 없었다며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역학(易學) 관련

저술인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가 있다.

◆ 모든 문제가 ‘나’ 때문이니, ‘나’를 없애야 한다
경당이 성리학의 요체이자, 도덕실천의 핵심 방법인 경(敬: 망념없이 마음이 하나되게 하는 수행) 공부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경을 자신의 호로 삼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경’자를 거처에 크게 써붙이고 살았던 그는 ‘경당(敬堂)’ 기문(記文)을 친구에게 부탁하는 글에서, 자신의 호이면서 당호인 ‘경당’과 정자인 광풍정(光風亭) 및 제월대(霽月臺)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자로 나의 당(堂) 이름을 짓고, 이것을 호로 삼았습니다. 또 주자(周子)의 뜻을 취해 나의 정자 이름 짓기를 ‘광풍정’이라 하고, 나의 대 이름을 ‘제월대’라

했습니다. 내 스스로 그 실상에 맞다는 것은 아니지만 고인들이 말한 것을 표적(標的)으로 삼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자 할 뿐입니다. 무릇 경이 아니면 마음을 주재할 수 없고 광풍제월이 아니면 도의 체(體)와 용(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대표적 성리학자 주자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 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과 같다’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경당은 글을 가르친 후 여가를 틈타 집 근처의 제월대라 이름을 지은 대에 올라, 선비들과 함께

노닐면서 예를 학습하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면서 가슴이 상쾌해지도록 한가로이 마음 가는대로 유유히 지냈다. 50여년 동안 이렇게 지내면서 안동부(安東府) 안으로 발길을 들인 적이 없었으므로, 이웃마을 사람조차 그의 얼굴을 보는 이가 드물었다.

“자기의 것은 많기를 바라고, 남의 것은 적기를 바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어진다면 누구는 많기를 바라며 또한 누구는 적기를 바랄 것인가.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고, 남이 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면 누구는 이기기를 바라고 누구는 지기를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데 뽐낼 것이 무엇이며, 내가 하늘이고 하늘이 또한 나이니

무엇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경당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 그릇의 밥이 비어도 개의하지 않았던 경당
경당은 어릴 때부터 단중과묵(端重寡默: 단정하고 점잖으며, 침착하고 말이 없음)했다.

차츰 자라면서 학봉 김성일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하는 방도를 깨달았다.

 

한결같이 이(理)를 밝히고 몸을 닦는 공부로써 요체를 삼은 그는 마침내 과거공부는 접고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각별히 받들면서 여러 경전을 두루 통달했다.

정밀하게 사색하고 실천하기에 힘쓰며 성현의 도를 배우기를 자신의 책무로 생각하는 그를 두고

학봉은 “학문을 함에 정(定)한 마음이 있으니 훗날 크게 성취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학봉이 별세한 후에는 서애 류성룡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 그 깊이를 더했다.

서애와 ‘이(理)’에 대해 논한 일이 있었다. 서애가 등불을 가리키며 “불의 빈 곳이 이인가”라며

물었다. 경당은 “빈 곳(虛)과 찬 곳(實)은 상대되는 것입니다. 이(理)는 상대되는 것이 없으니

아마도 허로써 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고 답했다.

서애가 즉시 답하기를 “허에는 허의 이가 있고, 실에는 실의 이가 있다”라고 하면서

이후로는 경당을 대단하게 여기게 되었다.

서애는 책상을 마주하며 마음을 보존하고 기를 기르는 요체에 대해 깨우쳐주었고,

경당은 잘못을 고친 바가 적지 않았다.

경당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겸손을 절조로 삼아 임천(林泉)에 숨어살면서

세상사는 멀리 했다.

늘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를 한 뒤에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고서 가묘(家廟: 집의 사당)를

배알했다. 그리고 주자화상(朱子畵像) 앞에 가 절을 했다.

서실에 들어가면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서적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었다.

생각에 잠겨도 깨달음이 없으면 밤이 끝나도록 잠을 자지 않기도 했다.

깨달음이 있을 때는 한밤중이라도 불을 켜서 글로 남겼다.

메모지를 늘 자리 곁에 놓아두고 자신의 언행을 적어두었으며, 날마다 연마한 것과

공부 수준을 점검했다.

그릇의 밥이 자주 비어도 그것을 즐겁게 여기며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의 명사 중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를 따르기도 하고,

자제를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그의 집 앞을 지날 때면 그를 찾아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홀로 있을 때 삼가지 않으면 모두 허식이다
경당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근독(謹獨)을 주로 하지 않으면 모두가 허식이다”며

‘홀로 있을 때 삼갈 것’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홀로 잠자리에 있을 때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한 구절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의 공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과 일상생활에 관한 것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

흔들림 없이 학문에 매진한 그는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없었다.

단연히 식견은 더욱 높아갔고, 깨달음을 더욱 순일확연해져 일의 변화에 응할 때면

각기 절도에 들어맞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곡진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부부간의 예절에 있어서도 손님을 대접하듯이

했다. 비록 옷걸이나 장롱, 옷가지나 이불 등의 물건이라도 모두 구분을 해서 각자의 것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했다.

친척을 대할 때도 은의(恩義)가 두터워, 가난해서 시집을 보내지 못하고 장가를 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용과 옷가지를 마련해 주어 예를 치르게 했다. 남의 나쁜 점을 듣게 되더라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고, 남의 좋은 점을 보면 반드시 칭찬을 해주었다.

마을 사람과 함께 할 때는 공손하고 성실했으며, 잘잘못도 심하게 따지는 일이 없었다.

화를 내며 다투거나 싸움질로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따뜻한 말로 깨닫도록 타일러

조용히 참을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존경하며 따랐고,

난폭한 사람도 감화되어 복종하게 되었다.

◆ 군자가 되려면 사욕을 극복해야 한다.
경당이 신미년 새해를 맞아 작성한 글이다.

‘경오년(1630)을 보내고 신미년(1631)을 맞았으니, 악(惡)은 경오년과 함께 떠나보내고

선(善)은 신미년과 함께 맞이하련다. 저 그윽한 산골짜기로부터 벗어나 이곳 춘대(春臺)에

오르니 요사한 안개는 걷히고 순풍이 감도는구나.

분함은 누르기를 산을 꺾듯이 하고, 욕심은 막기를 골짜기를 메우듯이 하면,

분함과 욕심이 사라지게 됨을 구름이 걷히는 가운데 해를 보듯 할 것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바르지 못한 것들이 드러나지 못하게 되니 천하가 모두

나의 문에 들 것이다. 이전 날에 기욕(己欲:사욕)을 극복하지 못해 인욕(人欲)에 빠져들었더라도

이제부터 기욕을 극복한다면 천리(天理)가 회복될 것이다.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소인이 되고 군자가 될 수 있으니, 군자 되려면 반드시 기욕을 극복해야 한다.

금수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아주 미미한 것에서 비롯되니, 금수되기를 면하려 한다면 어찌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새들도 머무를 곳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머무를 곳을 몰라서야 될 것인가. 도는 큰 길과 같아서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발로 걸을 수도 있다. 만리(萬理: 모든 이치)를 보는 것도 한 번 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천리(千里)를 가는 것도

한 번 걷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경당 불천위이야기
부친喪보다 스승의 喪을 먼저 챙겨...

경당 불천위에 대해 경당 11세 종손 장성진씨(1938년생)는 “관련 기록은 없으나

후손의 4대 봉사가 끝나기 전에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한다.

경당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2월2일)는 경당종택(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정침 대청에서

합설로 지낸다. 요즘 제사에는 안동, 대구, 서울 등지에서 온 20~30명이 제관으로 참석하며,

과일 진설은 조율시이(棗栗枾梨)순서로 하고, 편은 한 틀만 올린다.

제주는 청주를 사서 사용한다.

노하우가 필요한 밤, 대추, 잣, 유밀과 등을 괴는 일은 종손이 직접 한다.

종손은 이런 기술도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더 이상 배울 사람이 없어 결국 맥이 끊길 듯하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6·25전쟁때는 종택이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고, 인민군과 같이 생활했다고 들려줬다.

그러던 중 교전이 벌어질 테니까 피하라고 해서 4㎞ 정도 떨어진 뒷동네로 피했다 한다.

종손의 부친이 종손의 증조모를 업고 조부와 함께 피란했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니까

인민군은 길가에 앉아 있고, 시내에서 포가 날아오고 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집에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있는 동안 닭을 다 잡아먹고 병아리만 남아 죽어있었고,

지금도 그 불쌍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얘기했다.

다행히 사당이나 문적은 피해가 없었다.

경당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스승인 학봉도 같은날 상을 당했는데,

부친보다 선생을 우선시한 경당은 학봉 상을 다 치르고 나서 부친 장례를 치렀다는

일화도 들려줬다.

 

▼ 경당종택(서후면 소재), 경당 장흥효 선생이 태어나 살던 집

 

 

▼ 광풍정(光風亭,경북문화재자료 제322호), 경당 장흥효가 건립한 누각으로

조선 헌종4년(1838)에 개축하였으며, 그 뒤에는 자연바위 위에 지은 제월대가 있다.

 

 

제월대(霽月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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