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백졸암 류 직(1602~1662)

자즐보 2011. 12. 10. 16:58

백졸암 류 직(1602~1662)

본관은 전주. 자는 정견(庭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할아버지는 류복기(柳復起)이며,

아버지는 류우잠(柳友潛)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활동사항

류 직은 29세인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서사(書史)를 탐독하여 『중용(中庸)』『대학(大學)』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 황해도의 유생들이 그 시론(時論)을 타서 이이(李珥)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성혼(成渾)까지 문묘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소(疏)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들의 도덕이 높지 못하다고 승낙하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다시 성균관 유생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그 주장을 들고 나와, 중외(中外)가

호응하여 사론(士論)이 통일되었다고 주달(奏達)하였다.

이때에 영남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류 직은 소수(疏首)로 유생 800여 명과 함께 서울

올라와서 상소하였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류 직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때부터 류직은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부황을 해제할 것을 상소하여 벌을 모두 해제받았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문인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하였으며, 원근의 선비들과 인읍(隣邑)의 수령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다.

*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백졸암집(百拙庵集)』 4권 2책이 있다. 『백졸암집』에 실린 「여향교회중서(與鄕校會中書)」「답김생계광서(答金甥啓光書)」, 「여병산노림동주서(與屛山魯林洞主書)」는 당시 안동 지방 선비 사회의 현안 문제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답당생김연서(答堂甥金埏書)」에서는 자신의 공부 방법을 소개하였다. “먼저 『중용』『대학』을 익숙하게 입에 올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외웠고, 다음으로는 『심경(心經)』을 오랫동안 읽고 연구했으며, 근래에는 『주역(周易)』에 침잠하고 있다”라며 공부 방식과 순서를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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