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풍천면

하회마을 유*무형문화재

자즐보 2011. 8. 4. 15:00

 

 

 

하회마을(河回村)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座向)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세거(世居)한 성씨(姓氏)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풍산류씨의 입향(入鄕)에 관한 전설(傳說)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이 풍산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公이 花山에 여러 번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 귀촌(龜村) 류경심, 겸암(謙菴) 류운룡,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하회마을 유*무형문화재
 
 
▼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1687~1761)公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이신 전서(典書) 류종혜 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公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公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집으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 북촌댁 화경당(和敬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鶴棲) 류이좌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公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화경당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려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집이다.

 

 

▼ 작천고택(鵲泉古宅) 중요민속자료 제87호 

 
류시주가옥은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것이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公의 호를 따

「작천고택」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 남촌댁 염행당(念行堂) 중요민속자료 제90호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염행당(남촌댁)은 정종21년에 지은

99칸의 건물로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하였으나,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이 그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은 문간채는 솟을 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낼 정도로 사대부집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별당채는 별도로 일곽을 둘러 조성하여 후원 별당의 아취가 느껴진다.

벽체의 화방담은 화경당(북촌댁)의 화방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식이나 과장 없이

천연덕스럽게 장식하였는데, 기와쪽을 이용하여 석쇠 무늬를 바탕으로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 주일재 양오당(養吾堂) 중요민속자료 제91호  

 

 

이 집의 당호는 양오당이고 주일재(主一齎)는 류후장(1650~1706)의 아호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인 류만하公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인 류후장公이 증축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에 보이고,

좌측에는 작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이것을 내외담이라 하며,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

내외담을 쌓아둠으로써 문을 열어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주일재는 사랑채, 안채, 사당, 광(곡식 등을 넣어 두는 곳)채가 있다.

 

 

 

▼ 하동고택(河東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이라 부른다.

건축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公이 조선 헌종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 집이다.
   
특이한 점은 대문채는 초가집이지만 사랑채와 안채 등은 기와집인데,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안채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가사를 담당하는 부녀자들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 원지정사(遠志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5호

 
서애 선생이 선조 9년(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
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 빈연정사(賓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6호 

 
이 건물은 민속놀이 마당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어서 화천을 사이에 두고

부용대와 겸암정사가 바로 건너다 보인다. 겸암 선생은 선조16년(1583년)에

진보현감으로 계셨는데, 모친의 병환으로 사퇴한 후 이곳을 서재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크지 않은데도 방보다 대청을 더 중요시하여 온돌방 칸살은 좁게 하고

대청 칸살은 넓게 한 것이다. ‘빈연(賓淵)’은 정사 정면에 위치한 부용대 아래의

깊고 맑게 흐르고 있는 못을 말한다.

 

 

 

 

▼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남향으로 ,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은 것이다.

 

 

 

 

▼ 겸암정사(謙巖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겸암정사는 겸암(謙巖) 류성룡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 기슭, 화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마을 쪽에서는 낙엽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사는

겹집 형태의 일(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형으로 한 것이 특색이다.
정사의 왼쪽에 부설한 온돌 아궁이는 당초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기능만을 살렸을 뿐 너무나 질박하여 깔끔 떨 생각일랑 추호도 없어 보인다.

겸암정사에 게시된 현판 중에 「겸암정(謙巖亭)」은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친필이다.

 

▼ 징비록(懲毖綠) 국보 제132호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이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전란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어,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公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7책으로 간행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다.

 

 

 

 

 

▼ 화천서원(花川書院,경북기념물 제163호)

 

화천서원 사진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의 학덕을 흠모한 유림(儒林)이 정조10년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그 후에 2위를 추가 배향하였다.
고종 5년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996년에 복설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 경덕사
서당인 경덕사에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을 배향하였으며, 그 후 제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공과 종손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공을 배향하였다.
 
         ◆ 숭교당
          강당인 숭교당 정면에는 화천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고종 5년 화천서원의 훼철시에 주소와 함께 남은 건물이다.
          좌우로 방이 있는데 좌측은 입교재(立敎齋)라 하고, 우측은 사성재(思誠齋)라 한다.

 

 

 

 

병산서원(屛山書院,사적 제260호)

 

병산서원 사진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서,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을 배향하였다.
1863년「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병산서원의 전신(前身)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풍악서당」을 선조5년(1572년) 서애 류성룡(1542-1607년)

선생이 31세 때에 후학의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로 옮겼다.
광해군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서애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배향(配享)하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으며, 1629년에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 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병산서원 사진

         ◆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건물로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 입교당의 석축과 아궁이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에 있는 것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기 힘들다.
 
         ◆ 장판각(藏板閣)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 신문(神門)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 존덕사(尊德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정료대(庭燎臺)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로서, 마당 좌우에 1쌍이 있는데,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부분) 가지나
기름등을 태워 불을 밝혔다. 팔각형의 기둥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의미하고 있다.
 
         ◆ 관세대(관洗臺)
제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 병풍을 펼친듯한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

 

 

 

▼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의 2가지 놀이중 하회 선유 불꽃놀이가 선비들 놀이였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민들의 놀이였다.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서낭신에게

별신굿을 해왔는데, 굿과 아울러 서낭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탈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탈놀이 중에는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향하여 평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나무랄 수 있었으며, 양반에게 수작을 할 수도 있었다.
이 제도는 건전한 비판과 견제가 없는 사회는 온갖 폐단이 발생하므로,

양반이 서민에게 언로(言路)를 개방하기 위함이었다.

1928년 후 단절되었으나,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 (LINK 하회탈)과 함께

발굴하여 사라져가던 것이 재생되었고, 전 서울대 이두현 교수에 의해 해외주재 대사관을

통하여 외국에 하회탈춤이 홍보되었으며, 현재는「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와

동호인에 의해 상설공연장에서 매주 개최되고 있다.
놀이마당은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회선유(河回船游)줄불놀이

 

해마다 음력 7월 16일의 한여름 밤에, 하회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부용대 단애(斷崖)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선유시회(船遊詩會)를 겸한 불꽃놀이의

축제가 있었는데, 이 축제를 오늘날은 속칭 하회줄불놀이라 한다.
이 불꽃놀이는 높이가 70m 이상인 부용대 단애 밑을 흐르는 화천(花川:화산에서 이름을 딴

낙동강의 별칭)과 백사장(白沙場) 상공의 여기저기에서 은은하게 작은 불꽃들이 터지고,

화천(花川)에서는「달걀불」이라 부르는 등불들이 상류로부터 유유히 떠내려오면서

불빛이 강물에 아롱거리는 가운데, 강 위에서 배를 띄우고 선유시회를 한다.
시 한수가 지어질 때마다 부용대 정상에서 불붙인 솔가지묶음을 절벽 아래로 던져

활활 타는 불꽃이 절벽 아래로 폭포(瀑布)처럼 떨어질 때, 백사장과 배위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낙화(落火)야!라고 크게 환성을 올려준다.
이 낙화(落火)는 백사장 위의 은은하게 터지는 수없이 작은 불꽃 및 강 위의「달걀불」과 함께

그 밝기와 주기(週期)에 의하여 강약장단의 조화를 이루면서 불꽃놀이의 흥취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 놀이는 광복 후 경축행사로서 한차례 있었으며, 그 후 약30년 전 주한외국사절들에게 하회마을의 문화를

소개하기 위하여 이 놀이를 보여주자 모두 Wonderful!"을 연발하며 감탄하였으나, 준비의 어려움으로

탈놀이 처럼 자주 개최할 수는 없다. 이 불꽃놀이는 자연경관으로 높은 단애(斷崖), 단애 밑을 흐르는 강,

강변의 백사장(白沙場)과 소나무들의 3가지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할뿐만 아니라

문화(文華)가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서민들이 중심이 되었던

별신제의 탈놀이와는 대조를 이루었던 행사이다.

 

 


 

▼ 하회탈(국보 제121호)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로서 지금은 각시,중,양반,선비, 초랭이,

이매,부네,백정,할미 9개의 탈들만 전해지며, 3개의 탈이 분실되었다.

백정탈=소를 잡는 백정역이 쓴다.

부네탈=양반과 선비 사이에서 소첩역할을 하는 젊은 부인이 쓰는 가면이다

이메탈=선비의 하인역으로 바보탈이라고도 한다.

초랭이탈=양반의 하인역으로 경망하게 까불어대는 성격이다.

중탈=파계승이 쓰는 가면이다.

양반탈=양반역이 쓰는 가면이다.

할미탈=늙은 할미역이 쓰는 가면이다

선비탈=선비역이 쓰는 가면이다.

각시탈= 처녀가 사용하는 가면이다.

하회탈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먼저 그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던 중에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을 맥타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교수에게 소개하여,

1954년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해외 학계에 발표함으로써 하회탈이 세계제일의

가면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그 후에 국내 학계에서도 활발히 연구하여 국보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겉으로만 보지 말고 깊이 연구하여,

그 소중함을 알아야 함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잃어버린 탈(총각탈, 떡다리탈, 별채탈)을

저명한 조각가와 화가 및 미술사 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복원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운보 김기창 화백과 그 일행이 하회탈을 면밀히 감상해 보고서 하회탈의 오묘한

이치와 조형적 탁월성에 놀라 자기들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회탈의 작가는 허도령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허도령에게는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고 탈의 조각을 위하여 홀로 외딴 집으로 가기 전에

탈을 완성하기까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하였으나,

오래 기다리던 처녀가 사모하는 정을 가누지 못하고 허도령이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가서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문구멍을 뚫어서 안을 들어다 보는 중

허도령은 이를 보자 부정을 타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신의 계시란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의미하며

부정을 타서 죽었다.란 심혈을 다하여 작업 중에 있던 허도령이 영감이 흩어지게 되자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생각되며, 이처럼 목숨바쳐 이룩한 작품이기에

오늘날 세계 제일의 가면으로 되어 있다.

양반탈은 위로 향하면 웃는 얼굴, 밑을 향하면 성난 얼굴로 표정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털웃음을 웃을 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성을 낼 때는 얼굴을 아래로 하는

인체공학을 연구하여 조각되어 있으므로 광대의 몸짓과

자연스럽게 일치되도록 한 점도 두드러진다.

각시탈은 한쪽 눈이 가늘다. 이는 각시 광대가 얼굴을 살짝 돌리면 상대에게

눈을 흘기는 교태(윙크)가 되도록 하였다. 다른 탈 들도 제각각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의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은 재료가 오리나무로서 표면에 옻칠을 2겹 3겹으로 칠하여

정교한 색을 내었고, 격식과 세련됨을 갖추었으며, 부락에서는 별도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을 할 때 외에는 볼 수 없었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금기나 제약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하여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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