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궁궐 ♣
▲ 경복궁 향원정(香遠亭)//경복궁 후원의 정자. 인공연못인 향원지에 작은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워 나무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 다니게 했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었으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 오른쪽으로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며,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고종32년)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 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서울 신문로 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적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았다. 1869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 누각은 득월루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이다.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 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일장기가 걸린 건물의 용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기 위해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친구들아 함께 손잡고 수학여행가자꾸나. 하하~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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