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사공 성곡재사(城谷齋舍)
장태사 성곡재사(城谷齋舍)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삼태사의 한 사람인 안동장씨 장정필의 제단을 지키고 제사를 모시기 위한 집으로
1806년(순조 6)에 건립되었고, 1853년(철종 4)에 중건하였다.
또 다른 삼태사로는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이 있다. 태조는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정필을 각각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다.
영휘루(永輝樓)
1966년에 영휘루를 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정면5칸,측면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건물로 콘크리트 기둥이다.
영휘루 안쪽
추원재(追遠齋)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재사의 중심 건물이다.
동재(東齋)
정면3칸 측면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서재(西齋)
정면4칸 측면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성곡재사 중건기념비와 연못
성곡재사는 1966년 영휘루를 건립하고 보수정비하는 등 문중에서는
60년대에 큰 성황을 이루었던 시기였으며, 그 배경에는 한국일보 사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장기영(張基榮,1916~1977)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장씨 시조 태사공 장 정 필 ( 張貞弼 ,888~ ? )
태사 장정필은 888년 신라 진성여왕 때 중국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 장군인 장 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장길이다.
그가 5살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4년) 에 중국의 정치가 문란하자
어지러운 난국을 피해 아버지가 신라에 망명 할 때에 따라 들어와서 강릉에 살다가
경북 인동(구미시)에서 남쪽으로 10여리에 있는 노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후 18세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
문과에 장원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신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930년 (신라 경순왕 4년) 안동( 구,고창) 에서 고려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전투를 벌일 때
고창성주 김선평, 행장 김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고려태조에게 귀순하여 함께 후백제 견훤을
대파하여 안동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워 후에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김선평,김행과 함께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삼중대광아부벽상공신 태사에 올라
후에 안동 삼태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고창(안동) 군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하사 받아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장태사공 묘소
1541년(중종 36) 태사묘(太師廟)가 건립되어 삼태사를 향사하였지만
김선평, 권행과 달리 장정필은 묘조차 확인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재사가 성립된 후 1842년(헌종 8) 무덤 발굴을 통해 ‘장정(張貞)’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지석(誌石) 조각을 찾아 묘를 증빙하였다고 한다.
高麗三韓璧上三重大匡亞父功臣張貞弼祭壇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장정필제단) 옛 비석
비석 뒤에 보이는 바위가 산신을 모시는 제단인 듯,,,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장정필제단
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張貞弼祭壇
동편 문무인석
서편 문무인석
高麗太師圃蔭張先生尋誌碑(고려태사포음장선생심지비)
장태사 신도비각